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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한국 종교의 근본은 무교

작성자
연화암 총무
작성일
2015.10.31
첨부파일0
추천수
4
조회수
1580
내용

                        

NAVER카페 "무교와 연화암"에서 인용 

http://cafe.naver.com/0688lifecom/52

                       

  단군은 물론, 고구려, 신라의 첫 왕들도 모두 무당과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간주된다. 증산교를 세운 증산 강일순 등 우리나라 민족종교의 창시자들 역시 무교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증산교(대순진리회 포함)의 중심사상인 해원(解寃)은 무교의 살풀이 정신과도 다르지 않다. 


  세련된 형이상학적 체계를 갖추고 있었던 조선조 성리학자들도 제사만큼은 진지하게 바쳤는데, 이 제사라는 것이 신을 모시고, 받들고, 보내는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에서는 다분히 무교적 세계관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이미 무교인이었던 한국인이 성리학을 중심으로 중국의 유학을 '궁리'(窮理)의 차원에서 받아들인 셈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의 무교 문화는 전체적으로 한국인의 종교적 심성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무교 문화는 한국인의 골수에 박혀 있는 한국 종교문화의 또 다른 정수이다. 무교는 다양한 외래의 신들마저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포용적이며, 그러한 포용성을 가지고 스스로를 유지해왔다. 그러기에 수천년 동안 한국적 정신의 깊이를 구체적으로 담아내고 있으며, 그런 식으로 한국인의 원초적 정신 속에 깃들어 있다.

   일부 서구종교가 무교를 '미신'시하고 대대적인 타파의 대상으로 삼았지만, 그것은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내려고 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무당의 숫자는 도리어 늘었고, 서구 종교들은 오히려 무교의 여러 요소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게 될만큼 결과는 반대로 나타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식으로 무교 역시 끊임없이 변용, 지속, 생성되고 있는, 지극히 현대적인 현상이기도 한 것이다.

 

  무교가 불교, 기독교와 같은 외래종교에 미친 영향은 어떤 것이 있을까?

   고대에 외래에서 전해진 종교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라 할 수 있는 불교는, 토착신앙적 무교에게서 어떻게 영향 받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불교에서는 원래 칠성각이라는 것 자체가 없었으나 민간에 신앙되면서 민간 무속신앙과 결합되면서 생겨난 우리고유의 것이다. '칠성(七星)'은 무교에서 북두칠성을 신성시하여 붙인 '칠원성군(七元星君: 탐랑(貪狼), 거문(去文), 녹존(祿存), 문곡(文曲), 염정(廉貞), 무곡(武曲), 파군(破軍)'의 일곱성군)에서 나온 말로, 무교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신들이다. 우리나라의 불교에서는 이러한 무교의 신들을 포용하여 그들을 따로 모시는 장소를 마련함으로써 민중들을 회유하려 하였다. 그 외에도 산신령을 모신 산신각(山神閣)이나 정신(井神)신앙, 신중신앙(神衆: 화엄신장)등 한국 불교에는 무교적 개념을 도입한 것들이 상당하다.

 

  불교와 무교의 습합과 관련해 가장 흥미로운 모습을 보이는 것은 바로 미륵신앙이다. 현재 우리나라 국토 전역에는 갖가지 모양의 크고작은 미륵 돌부처상이 곳곳에 널려있다. 전국에 이름난 경치가 있는 산이나 절벽은 물론, 마을 어귀, 큰 나무 아래, 심지어 논밭 가운데에서도 미륵상들을 수없이 볼 수 있다. 이것은 대개 조선시대에 주조된 것들로써, 당시의 미륵신앙이 얼마나 민중들사이에 광범위하게 신봉되어왔는가를 잘 보여준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당시 숭유억불(崇儒抑佛)정책을 펴던 조선시대에 불교의 미래불(未來佛)인 미륵이 어떻게 그렇게 민간에 널리 신앙되었나 하는 것이다. 당시 불교 사찰등은 산속으로 모두 도피하였고 마을에는 유교적 교화를 담당하는 양반층이나 혹은 무교의 무당들이 민간인들에게 더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토록 많은, 그것도 민중의 손에 의해 갖가지 소박한 미륵상이 주조된 것은, 당시 미륵신앙이 불교적 개념을 초월하여 무교와 습합되면서 어떤 영험한 존재라면 무조건 '미륵'이라는 이름을 달고 민간신앙화 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현대까지 남아있는 무교의 모습으로 가장 대표적인 것은, 앞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개인이나 가족의 중대사를 앞두고 흔히 점을 치거나 굿을 하거나 부적을 만드는 것과 같은 행위이다. 사실, 점을 치는 것은 무당의 한 기능으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있어온 문화적 행위이지만 한국 무교에서의 점은 좀 더 특수하다. 즉, 무당의 몸에 그가 모시는 신령이 씌워 신복을 보아주는 것이다. 이는 시베리아적 샤머니즘의 전형적인 모습이라고 하는데, 무교에서는 이것을 '무꾸리'라고 하여 그 영험함과 특수함을 중시해왔다. 이것은 흔히 보는 사주, 궁합과는 다른 것으로, 무당은 신과 인간의 중재자가 되어 신의 말씀을 전하고 그것을 해결하기위해 그가 직접 노력하는 것이다.

 

  그 노력중 하나가 부적을 만드는 행위라고 할수있는데, 오늘날에도 각계각층의 많은 한국인들이 무당에게 돈을 지불하고 부적을 만들어 몸에 지니거나 집의 문설주에 붙이고 있다. 부적에는 시험에 붙게 하는 부적, 남편의 첩을 떼게 하는 부적, 재물이 늘어나게 하는 부적, 병이 달아나게 하는 부적 등 그 종류는 여러 가지이다.

 

  이렇듯 많이 이용되는 것을 보면, 부적은 그것을 믿든 안 믿든 한국 사람들의 마음에 어떤 심적인 위안을 주는 것 같다. 심지어 기독교인이나 불교인들도 몰래 부적을 만들어 지니는 사람이 있다하니, 이를 볼 때 무교가 한국인의 심리에 얼마만큼 기본을 형성하고 있는지를 짐작케 한다.

또, 무당들이 신의 뜻을 전하고 해결하려는 또다른 방편으로 굿이 있다. 이러한 굿은 전통 농업사회에서는 개개인의 문제를 해결하기위해서 뿐만이 아니라, 온 마을사람들이 모두 다같이 참여하여 굿판을 벌이며 즐기는 등, 공동체 의식을 키우는 역할을 해서 사회적으로 의미가 깊었지만, 현대 산업사회에 이르러 개인화 경향이 심해지면서 굿도 개인 기복적(祈福的 )경향이 많다.

 

  어쨌건, 오늘날에도 집안에 부정이 탔다거나 가족 중 누군가가 알 수 없는 병에 걸렸을 때 가끔 굿을 하는 것을 목격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굿보다도 일반적으로 더 많이, 또한 대중에게 거부감 없이 행해진다고 할 수 있는 무교적 의례행위는 바로 '고사(告祀)'이다. 흔히 새 건물이나 사무실에 입주할 때, 혹은 어떤 사업이나 장사를 새로 시작할 때 베풀어지는 고사를 우리는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다. 고사는 본래 무교에서 행하는 치성의 한 종류로써 봄 가을에 가정집에서 안택(安宅)고사를 지냈지만 특별한 경우에는 따로 올리기도 했다고 한다. 고사는 오늘날 우리주위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무교적 행위 중 하나이다.

 

  그러나 위와 같은 행위는 그래도 무교를 어느 정도 인정하는 사람들에 의해 행해지는 일이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현대 한국사회에서 전반적으로 무교는 인정받지 못하는 경향이 있으며 특정종교에서는 그러한 행위를 공공연하게 금지하기도 한다. 하지만 역시 무교가 한국인들의 사고방식에 끼친 깊은 영향은 다른 측면, 즉 언어적 측면에서도 상당수 볼 수 있다. 때문에 무교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까지도 저도 모르게 무교적인 말을 사용하곤 한다.

 

  우리는 흔히 '재수좋다', '재수없다' 등의 말을 자주 쓰는데, 이 '재수(財數)'라는 말은 원래 '재물에 대한 운수'의 뜻으로 무교에서 '재수굿'처럼 많이 쓰이던 말이었으나 이후 행운의 개념으로 일반화되면서 많이 쓰이는 말이 되었다. 또한 어떤 나쁜 일이 있었을 때는 흔히 '액땜했다'고 하며 별 것 아닌 것으로 치부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역시 무교에서 나온 말로, 나쁜 일을 막는 굿의 과정에서 닭을 죽인다거나 돼지를 잡는등 다른 희생물을 통해 그 화를 대신 덧씌우려는 행위에서 나왔다고 한다.

 

  또한 어떤 물건을 사놓고 쓰지 않아 무용지물이 되었을 경우 '고사 지냈다'라는 말을 쓰기도 하는데 이는 역시 위에서 전술한 바와 같은 무교의 의식, '고사(告祀)'에서 나온 말이다. 그 외에도 어떤 일에 정신없이 몰두했을 때 '신들렸다'라는 말이나, 흥이 오를 때 '신난다'라는 말 등, 생활 언어속에 남은 무교의 영향은 이외에도 많다.

 

  현대에 와서는 기독교가 눈에 띄게 융성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교회의 급성장은 우리나라 심성에 깊이 깔린 무교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이라 한다. 그것은 70년대의 성령운동과 그 제반되는 신앙의 양상에서 뚜렷이 나타난다.

 

  얼마 전 모 방송사에 불시 침입해 큰 혼란을 빚었던 만민성결교회의 예배모습을 방송에서 본 적이 있었다. 흡사 무대장치라고 할 만큼 극적인 연출을 보여주는 예배당, 열광적으로 박수치고 눈물 흘리는 신도들, 하느님의 성령을 받았다며 모든 병을 고친다고 손을 들고 소리치는 교주의 모습은 언젠가 본적 있던 굿판을 확연하게 연상시켰다. 물론, 그 교회의 경우는 지나치게 비이상적 행위로 사회에 물의를 일으킨 경우이나, 굳이 그 경우가 아니어도 우리는 주변의 교회에게서 그와 유사한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또한 한국 기독교에서는 영적 권능을 받았다고 하는 자들이 무수하고, 무슨 기적을 일으켰다거나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다는 자들이 너무나 많다. 그리고 많은 신도들이 그러한 말들에 귀기울이고 그 밑에 모여든다. 우리나라 곳곳에서 일어나는 새벽기도회, 철야기도회, 기도원은 다른 나라의 기독교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현상이라고 한다.

  

  무엇보다도 가장 비슷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기독교인들이 성령을 받아 하느님과 대화할 때 쓴다는 '방언'이다. 이것은 기독교인들이 신앙의 정점에 올랐을 때 트인다는 특이한 언어로써, 흥분 상태에서 마구 말함으로써 보통사람은 알아들을 수 없는 특이한 말이다. 이것은 굿판에서 무당들이 접신 상태에서 신의 말을 전하는 모습과 상당히 흡사하다. 이것은 서양 기독교 교회의 경건한 기도 자세와는 다르게 우리나라에서 유난히 두드러지는 현상임은 확실하다. 이것은 기독교역시 외래종교의 하나로써 한국화했는 것을 잘 보여준다.

 

  오늘날 부흥하는 대형 개신교회는 대부분 무교적인 뜨거움을 추구하는 교회이다. 한국 개신교의 부흥회, 통성기도는 굿판과 유사하게 보인다. 성령 쇄신운동을 유지 발전시켜나가게 만드는 가톨릭의 분위기도 사실상 우리나라의 무교적 기질과 본질적으로 다른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유독 한국 그리스도교에서 광범위하게 전개되는 새벽기도회나 새벽미사는 새벽 치성을 드리던 무교적 분위기 내지는 새벽 예불이 주는 종교적 경건함의 연장과 유사하다.

    

  이렇듯 외래에서 전래된 불교와 기독교는 모두 우리민족의 의식전반에 깔린 무교의 영향을 어떻게든 받아 변했다. 앞으로 유입되는 다른 종교들 또한 그러할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무교는 오늘날 우리에게 있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커다란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좋든 싫든, 믿든 안믿든 간에 그것은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그 사고방식을 갖고있으며 그것은 우리의 생활양식이나 사고방식 전반에 알게 모르게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인정하고 새롭게 그 가치를 발굴함으로써 사회적으로 점차 음성화 되고 있는 무교를 하나의 전통신앙으로 당당히 인정하고 다른 종교와 마찬가지로 너그러이 포용할 수 있어야 하겠다.


  문제는 종교들을 바라보는 우리 자신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자신이 제대로된 분별력과 신심을 가지고 전통의 아름다운 것을 인정해 승화시킨다면 무교이건 어떤 종교건 간에 심성을 닦고 정신을 고양시킬 수 있는 참다운 종교생활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특히나 무교는 종교 뿐만이 아니라 역사학이나 언어학, 예술 방면에서 우리 선조들의 옛모습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가치를 지니기 때문에 더욱더 그러한 작업이 선행돼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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